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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스토리

로봇과 개

  • 작성자
    구본진
  • 참여자
    구본진
  • 작성일
    2021-09-22
  • 세부분야
    소설
  • 조회수
    199
  • 최종수정일
    -
  • 해시태그
    # 단편소설 # 로봇 # 디스토피아

로봇과 개1) - 구본진 

 

 

 

 

 

 

 

 

 

사막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휘날리는 모래먼지뿐이었다. 바람이 잦아들자 그제야 뿌연 먼지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두 개의 형체가 드러났다. 

 

하나의 형태는 인간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것의 피부는 부드럽지 않고 단단한 물성의 소재로 덮여 있었다. 몸 구석구석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신경이나 근육이 아닌, 가는 전선이었다. 단단하고 밋밋한 그의 뒤통수에는 ‘AA-001’이라는 문구가 새겨 있었다. 

 

다른 쪽은 개 형태를 한 로봇이었다. 늘씬한 몸통과 뾰족하게 솟은 귀는 독일산 사냥개를 본뜬 듯했다. 물론 로봇은 부드러운 털과 피부 대신 플라스틱과 철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절벽 끝에 나란히 걸터앉아 협곡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에는 끝없는 사막과 황무지의 삭막한 풍경이 전부였다. 인류가 떠난 지구에는 공허만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서로 스쳐대는 건조한 소리와 멀리서 가끔씩 들려오는 폭발음만이 그 공허를 메꾸는 중이었다. 

 

“AA.” 

 

먼저 침묵을 깬 쪽은 개였다. 

 

“이젠 선택해야 할 시간이야.” 

 

들었는지 말았는지 AA는 그저 협곡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급했는지 개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AA….” 

 

“처음 깨어났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 

 

AA가 말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조로운 기계음이었다. 

 

“배터리. 그때 본 풍경을 기억해?” 

 

배터리라 불린 개는 AA를 잠깐 바라보고 덤덤한 투로 답했다.  

 

“기억하지.” 

 

AA는 처음 깨어났던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분명 그때와 같은 풍경인데…. 너무 다르게 느껴져.” 

 

 

 

* * * 

 

 

 

AA가 처음 눈을 떴었던 때는 어느 밤이었다. 그는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주변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꽤 널찍한 연구실이었다. 먼지 낀 채 방치된 PC 몇 대, 그 사이 벽처럼 세워진 메인프레임 컴퓨터 몇 기, 어지럽게 얽혀 있는 전선들. 오랜 기억 같은 것이었을까. 분명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지만 AA는 저것들의 역할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형태는 다르지만 AA의 머릿속에 있는 것과 같은 일을 한다. 

 

몇 차례 주변을 돌아본 AA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끼익-. 끼익-. 오래도록 굳어 있던 관절에서 거북한 소음이 일었다. AA는 맞은편의 PC 한 대로 다가갔다. 뿌옇게 덮인 먼지 층을 걷어내자 시꺼먼 모니터가 드러났다. 반짝이는 모니터에 매끈하고 하얀 얼굴이 비쳤다. 동그란 두 눈 아래 코와 입이 단순한 형태로 새겨진 얼굴이었다. AA는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표정을 지어 보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두 눈 속 렌즈만은 총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연구실 밖은 어두웠다. 종종 멀리 어둠 속에서 섬광이 일었다가 죽곤 했다. AA는 빛과 소리의 방향을 따라 절벽을 향해 걸어갔다. 절벽 아래 협곡은 수풀 하나 없는 황무지였다. 달빛에 차갑게 식은 그 협곡에서는 폭발음이 끝없이 울려오고 있었다. 한 차례 폭발이 멈추고 나면 협곡 양 쪽에서 두 개의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벌 떼 같은 총성이 그들을 뒤따랐다. 서로 뒤엉켜 싸우는 두 무리는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고 있는지조차 불확실해 보였다. 전쟁이었다. 

 

AA는 절벽 끄트머리로 다가가 협곡 속 무리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형태는 인간과 닮아 있었다. 무리는 인간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허리를 세워 직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과 같지는 않았다. 피부 대신 합금을 두르고 근육과 신경 대신 전선과 케이블로 몸을 지탱했다. 먼지가 좀 묻긴 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매끈했다. 동그란 두 눈과 단순한 형태의 코와 입. 그들의 얼굴은 AA와 같았다. AA와 똑같이 생긴 수많은 로봇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똑 닮은 존재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AA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로봇의 정신에 충격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AA는 이때의 경험을 충격이라는 단어로 기억했다. 그것은 물리력에 의한 충격과 다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광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려는 과정에서 AA의 논리회로에 적잖은 과부하가 걸렸다. 과부하는 순간적으로 AA가 신체를 제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AA는 몸을 지탱할 곳을 찾아 비틀거리며 실내로 돌아왔다. AA는 처음 겪는 이 모든 일들이 당혹스러웠다. 

 

 

 

AA가 혼란스러워 하던 그날도 개는 오래된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황무지 곳곳에는 비상 전력을 남겨둔 기계나 방전되지 않은 배터리가 버려져 있곤 했다. 낡은 로봇 개는 이렇게 주변에 남은 전력을 모아가며 버텨왔다. 그도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그를 아끼던 어린 주인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는 지구를 떠났다. 개의 주인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마지막 인간 한 명까지 모두 실은 우주선이 출발하던 날, 개는 혼자가 되었다. 

 

인류는 떠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급하게 지구를 떠나던 인류에게는 전쟁을 마무리할 이유도, 능력도 없었다. 전쟁의 기능마저 로봇에게 맡겨두었던 그들은 다시 한 번 책임을 저버리고 지구를 떠났다. 인류가 떠난 이후에도 로봇들은 같은 모습으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는 원하지도 않았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개는 그런 지구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총알과 폭발을 피해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다. 운 좋게 네트워크에 접속된 기계를 발견하면 무선 충전 기능을 이용해 비상전력을 빼돌려 전력을 보충했다. 그것이 개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황무지의 통신망에서 전력이 남아 있는 새로운 장치가 발견되었다. ‘저 기계 정도면 일주일분 전력은 얻을 수 있겠네.’ 개는 눈앞에 보이는 낡은 건물로 기어들어갔다. 그것이 개와 AA의 첫 만남이었다. 

 

 

 

조심스레 실내로 들어온 개와 눈이 마주쳤을 때, AA의 두 눈은 두려움보단 흥미로 반짝였다. 바깥의 참혹한 풍경에 질려 있었던 AA에게 새로운 존재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었다. 

 

“넌 누구니?” 

 

AA가 말을 걸자 개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개는 잠시 자리에 멈춰 AA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AA에게 적의가 없음을 눈치챈 개는 퉁명스레 한마디 뱉었다. 

 

“놀랬잖아. 생긴 건 바깥의 저것들과 똑같이 생겨가지곤.” 

 

AA는 말없이 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게는 누군가와 나누는 첫 대화였다. 개에게도 오랜만의 대화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누구냐고? 이젠 기억도 안 나는데. 누군가에게 불려본 적이 하도 오래 전이라.” 개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누군가에게 불려본 적이 있어? 다른 이와 대화한 적도?” 

 

“당연하지. 나 같이 멋있는 애완 로봇은 주인이 있기 마련이라고.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귀찮은 투가 역력한 답변이었지만 AA는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여긴 어떻게 왔니? 혹시 이곳이 어딘지 아니?” 

 

“나도 몰라. 그건 하루 종일 여기 쪼그려 앉아있던 네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 대답엔 확실히 짜증이 묻어났다. 

 

“난 한낱 로봇 개야. 정처 없이 떠돌다 이제 막 쉴 곳을 찾은 불쌍한 개라고. 그러니까 내 소중한 식사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줘.” 

 

말을 마친 개는 이곳에 남아 있는 전력 장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AA는 그런 개의 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는 저토록 열심히 움직이는 개의 모습이 신기했다. 

 

“정처 없이 떠돌았다고? 어쩌다?” 

 

AA의 거듭된 물음에 개는 한 차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나 바깥의 저 로봇들, 그리고 여기 있는 기계들은 인류에게 정말 중요한 거였단 말이야. 그런 기종은 최신 부품들을 많이 탑재하고 있어. 스스로 에너지를 합성할 수 있는 발전 장치 같은 거. 구식 무선 충전 기능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은 아주 고급 물품들이지.” 

 

“고급이라고…?” AA는 믿기 어렵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반면 나 같은 구식 애완 로봇은 그런 게 없단다. 자가 발전 따위 안 되는 충전식 전원 장치뿐이라고. 탑재된 기능이라곤 무선 통신이랑 무선 충전 기능밖에 없을 때는, 이렇게라도 남은 전력을 찾아다녀야 해.” 

 

AA는 그저 신기했다. 그로서는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개는 AA에겐 이제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AA에게서 등을 돌리고 통신망을 조사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분명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신호의 위치를 확인하던 개는 큰 어려움 없이 PC 한 대를 찾아냈다. AA가 깨어났던 자리 맞은편에 놓여 있던 그 PC에는 AA가 먼지를 닦아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드디어 찾았네. 전력이 넉넉한 걸 보니 꽤 중요한 물건이었던 모양이지?” 

 

개는 신이 나서 PC 주위를 살피며 몇 바퀴 돌았다. 그 모습을 보던 AA가 물었다. 

 

“전력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그 말을 들은 개는 돌던 것을 멈춘 채 AA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마 비웃음이었을, 괴상한 쇳소리를 내더니 AA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전력이 없으면 우린 살 수가 없다고. 너는 배터리가 있어서 계속 살아갈 수 있고 나는 이렇게 전력을 모아가며 살아가는 거야.” 

 

“그래야 살 수 있다고? 그럼 그다음은?”  

 

“다음…?” 

 

AA의 계속된 물음에 개의 말문이 막혔다. 

 

“사는 건 어떤 건데? 왜 살아가는 거야? 그 정도로 소중한 거야?” 

 

“소중하다기보다…. 아니, 소중한 건가? 아, 몰라도 돼. 이 꼬맹이야!” 

 

제풀에 성을 낸 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시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계속 살아가면, 지금처럼 계속 걷다 보면…. 주인을 다시 만날지도 몰라.” 

 

개가 나지막이 말했다. 

 

“주인? 주인이 뭐지?” 

 

“이런.”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뱉은 개는 마치 물에서 건진 강아지처럼 고개를 몇 번 털어대고는 말했다. 

 

“넌 도대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뭐야?” 

 

“주인이란 게 뭐야? 그게 전력을 찾아다니는 이유인 거야?” 

 

AA의 마지막 말에 개는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개는 마치 혼잣말인 듯 말을 이었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 주인은…. 주인은 삶을 버틸 만큼 소중한 존재인거야. 넌 주인이 없니? 생각해 봐. 너를 만들었거나, 너를 가졌거나 너를 아껴줬던 이가 없느냐고.” 

 

AA는 멍하니 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모습에 개는 답답하기만 했다. 

 

“어휴. 말을 말자. 난 충전을 해야겠어.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네 주인이 아니고 이 PC에 전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이 PC는 켤 수 있다는 거지?” 

 

“뭐라고? 물론 켤 수야 있지. 근데 굳이 그럴 필요는…. 이봐, 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개의 말을 가만히 듣던 AA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PC를 향해 다가갔다. 

 

“이 기계는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맞은편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어. 내가 제일 처음 본 물건이라고. 어쩌면 이게 내 주인일지도 몰라.” 

 

개는 답답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진한 로봇에게 무엇부터 가르쳐주어야 하나. 개는 PC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AA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찾아 눌렀다. 

 

“이렇게 켜는 거야. 답답한 녀석아.” 

 

개가 버튼을 누르자 약간의 진동음과 함께 컴퓨터가 살짝 떨렸다. 곧 까맣던 모니터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AA는 모니터에 얼굴을 갖다 댔다. 

 

 

 

그 속에는 인류 문명이 남긴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 오랜 시간 떠돌이 생활을 한 개에게도 낯선 풍경이었다. 한 영상에서는 초록빛 잎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들 사이에는 각종 곤충과 작은 동물들이 기어 다녔다. 그들은 로봇이나 기계가 아닌 부드러운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그 사이로 개울이 세차게 흘렀다. 모두 그들에게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지구라고 되어 있어. 맙소사.” 

 

“지구는 예전엔 저런 모습이었구나.” AA는 영상들을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PC 속에는 다른 영상들도 많았다. 지구의 자연과 인류가 이룩한 문화들, 그리고 그것들이 파괴되어 온 역사가 빠짐없이 PC에 담겨 있었다. 어떤 영상에는 개 한 마리와 단둘이 남은 소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앞선 영상과 달리 황폐화된 지구의 모습은 지금 AA가 서 있는 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녀석의 이름은 ‘블러드’래.” 

 

AA가 영상 속의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블러드란 건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야.” 개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AA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배터리.” 

 

“뭐라고?” 개가 물었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배터리라고 했지?” AA가 말했다. 

 

“널 배터리라고 부를게. 저기 나오는 개처럼.” 

 

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AA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개는 창밖으로 눈을 돌리더니 한참 말이 없었다. 혹시 개의 맘이 상한 건 아닌지 AA가 걱정하기 시작할 찰나, 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말 말고 하던 일이나 마저 끝내. 난 이 컴퓨터의 전력이 필요해.” 

 

늘 그렇듯 퉁명스레 말을 뱉은 배터리는 자신의 주둥이로 모니터를 건드려 남은 영상을 확인했다. 

 

 

 

이제 컴퓨터에 남은 영상은 단 하나였다. 영상의 제목은 ‘AA-001’이었다. 

 

“네 머리 뒤에 새겨진 문구와 같아.” 배터리가 말했다. 

 

“어쩌면 정말 네 주인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르겠네.” 

 

AA는 차분히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의 배경은 그들이 서 있는 연구실이었다. 지금의 낡고 망가진 모습과는 달리 꽤 깨끗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차분한 자세였지만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After Apocalypse-001’에게 전한다. 이름처럼 넌 종말 후 작동을 시작하는 첫 로봇이 될 거야.” 영상 속 인물이 말하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AA는 그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의 계획대로 시스템이 작동했다면 넌 인류가 지구를 떠난 지 100년째 되는 날 활동을 시작해서 이 영상을 보고 있을 거야. 우린 널 만들었고, 널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 상황도 우리 손으로 만들었지.” 

 

AA는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그를 만들었다고 했다. 배터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AA의 ‘주인’인 셈이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언제부턴가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에너지도, 자원도. 모든 것이 모자랐지. 인류는 점점 조급해졌고 국가는 사소한 것에도 무력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전쟁은 예견된 일이었어. 우린 그 전쟁을 위해 전투용 로봇을 만들었다. 처음엔 그게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했지. 군인 대신 로봇을 통한 대리전이라면 인명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으니까. ‘착한 전쟁’이라고들 불렀다.” 

 

“바깥의 깡통들 말이군.” 개가 말했다. 

 

“그게 어리석은 변명이란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어. 전선에 사람이 있든 없든, 전쟁은 인류와 지구를 더 빠르게 파괴했지. 로봇 기술의 성장 속도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전쟁은 오히려 더 승부가 나지 않고 점점 장기화되기만 했다. 길어진 전쟁의 끝은 결국 전체 인류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어.”  

 

영상은 계속되었다. 

 

“의미 없는 전쟁을 끝내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전투를 로봇의 손에 맡겨두고서, 우리 손으로 언제든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착각이었어. 우리가 만든 로봇들은, 우리가 내린 ‘전쟁에서 이기라’는 명령 때문에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막으려는 시도들을 임무 수행에 방해되는 장애물로 인식했던 거야. 총을 내려놓은 우리들이 그 엄청난 군대를 막아서는 건 역부족이었다.” 

 

AA의 주인은 목이 타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캔 속 음료를 들이켰다. 그러곤 호흡을 잠시 가다듬더니 이내 녹음을 이어갔다. 

 

“결국 인류는 지구를 떠나는 걸 택했다. 잠시 후면 지구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대로 지구를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전에 만들어둔 로봇의 설계를 바탕으로 널 만들었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좀 더 업그레이드시켜서 말이야. 네가 우리를 위해 간단한 임무 하나를 수행해주길 바란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눈앞에 있는 컴퓨터를 살짝 조작했다. 곧 화면에 좌표 하나가 띄워졌다. 

 

“이 위치로 가면 로봇 군대의 코드를 제어할 수 있는 메인 컴퓨터가 있을 거야. 전쟁이 계속되는 한 인류는 위험한 지구로는 돌아갈 수 없다. 네가 이 컴퓨터로 전쟁을 멈추어다오. 우리와 우리의 사랑하는 지구를 위해서. 그 융통성 없는 깡통들과는 다르게 넌 스스로 더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임무를 위해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더 효과적인지 잘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이 정도 인공지능을 탑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극단적인 상황에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한 법이지. 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연구원은 떨리는 손을 화면을 향해 뻗었다. 이어 화면은 꺼졌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임무….” 

 

AA는 영상이 사라진 뒤에도 화면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에게도 주인이 생겼고, 해야 할 임무가 생겼다. 갑자기 던져진 세상 속에서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주인을 그리워하는 배터리가 내심 부러웠던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이미 전력은 열심히 챙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가만히 서 있던 AA에게 개가 한마디 던졌다. 그제야 AA는 개의 존재를 기억해낸 듯 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도와줘서 고마워, 배터리. 덕분에 내 주인을 만날 수 있었어.” AA가 말했다. 

 

“이제 나도 할 일이 생겼네. 황무지로 나가야겠어.” 

 

AA의 말에도 배터리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어느새 충전 준비를 마치고 잠시 쉴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잘됐군. 나도 충전을 편안하게 마칠 수 있겠고 말이야. 꼭 임무를 완수하길 바라.” 그러나 AA는 대화를 마치고도 떠나지 않고 배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배터리는 그런 그를 무시하려 애쓰다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뭔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말을! 답답해 죽겠네.” 

 

“영상에 나온 위치가 어디인지 아니?” 

 

배터리는 꼬리로 바닥을 한 차례 내리쳤다. 그는 AA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주길 바랬다. 그러나 거절할 명분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당연히 알고 있지. 난 너랑 다르게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많으니까.”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충전을 마쳤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리 말하지만 나도 그 쪽에 볼 일이 있어서 가는 거지 널 도우러 가는 건 아니야. 메인컴퓨터라고 했지? 그 근처엔 안 쓴 전력들이 충분하겠군.” 

 

말을 마친 그는 연구실 밖으로 네 발을 내딛었다. 퉁명스런 말투와 달리 그의 꼬리는 오랜만의 모험에 박자감 있게 흔들리고 있었다. AA는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를 걸으며 둘은 조금씩 대화를 이어갔다.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개가 말했다. 

 

“내가 그 로봇들을 어떻게 피해 다녔는데. 그런 곳에서 떡하니 마주칠 줄이야. 그 자리에서 분해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왜 바로 달아나지 않았어?” AA가 물었다. 

 

“넌 총이 없었거든.” 개가 답했다. 

 

“다른 놈들은 전부 총 하나씩 들고 다니면서 움직이는 건 다 쏘아버린단 말이야.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녀석들이고. 그런데 넌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잖아.” 

 

개는 오랜만의 대화가 내심 즐거웠다. 그러나 AA는 어느 순간 가만히 서서 앞 쪽의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조건 쏘아버리는 건 아닌 모양인데?” 

 

AA는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AA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는 한 무리의 로봇 군대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 중 지휘관처럼 보이는 로봇이 한 발 앞으로 나와 AA에게 말을 걸었다. 

 

“멈춰라. 소속을 밝히도록.” 지휘관 로봇이 말했다. 그 역시 AA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군 소속인가? 왜 무기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거지?” 

 

지휘관의 재촉에 AA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요. 소속이 뭐죠?” 

 

AA의 대답에 배터리는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로봇들은 적잖이 놀란 듯했다. 지난 100년의 반복적인 임무들 중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지휘관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침착하게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AA에게 다시 물었다. 

 

“탈영병인가. 처음 있는 일이군. 옆의 지저분한 물건은 뭐야?” 

 

개는 지휘관의 눈치를 살피며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군견이다. 이 새끼야.” 

 

지휘관은 여전히 탐탁지 않는 눈빛으로 둘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뒤의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적의 첩자일지도 모른다. 탈영병은 체포하고 기계는 분해시켜라. 부상병들에게 필요한 부품이라도 건질 수 있겠지.” 

 

그의 말 한마디에 로봇들은 재빨리 움직여 AA와 배터리를 제압했다. AA는 렌즈가 가려진채로 끌려갔다. AA를 부르던 배터리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져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병사들은 AA의 렌즈를 가린 천을 벗겨냈다. 그곳은 지휘관의 사무실이었다. 지휘관은 AA를 데려온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물러나 있게. 단 둘이 심문하겠네.” 

 

곧 병사들이 물려났다. 지휘관의 두 눈 속 렌즈는 여전히 AA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분명 AA와 같은 동그랗고 표정 없는 렌즈였지만 AA와는 여실히 다른 느낌을 줬다. 

 

“사실 자네가 적군이 보낸 첩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네.” 

 

오랜 침묵 끝에 지휘관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깨끗해. 지난 100년간 한 번의 전투도 겪지 않은 것 같아. 아니,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지. 마치 100년 동안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가 갓 출시된 신제품 같단 말이네.” 

 

지휘관은 포박된 AA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문을 등지고 선 그는 AA를 구석으로 몰아가며 말했다. 

 

“자넨 정체가 뭔가. 주어진 임무가 무엇이지?” 

 

AA는 답하기 시작했다. 처음 눈 뜬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그에게는 거짓말하는 재주 같은 건 없었다. 

 

“당신들을 막고 전쟁을 멈추는 게 제 임무입니다.” 

 

지휘관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00년이 지나도 집요하군. 우리나 인류나.” 

 

그는 잠시 큰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그런 그에게 AA가 물었다. 

 

“왜 집요한 전쟁을 계속 이어가시나요?” 

 

“우리라고 전쟁을 멈추고 싶지 않겠나? 100년간 똑같이 생긴 놈들과 끝없는 전투를 하고 있으면 아무리 전쟁광이라도 지긋지긋할 걸세. 하지만 말이야. 그게 우리의 임무야. 아무리 지겹고 싫고 짜증이 나더라도 우리의 컴퓨터 속에 장착된 제 1 명령은 ‘전쟁에서 승리하라’였다고.” 

 

그의 말을 듣던 AA는 자신을 만든 주인이 로봇 군대를 향해 ‘융통성 없는 깡통’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지휘관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로봇은 인간과는 달라. 어떤 상황에서도 명령을 거부하지 못해. 군인으로선 완벽한 셈이지.  명령에서 벗어나 스스로 전쟁을 멈출 수 있었다면 우린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었겠지.” 

 

AA는 혼란스러웠다. 인류는 로봇이 ‘인간이 아니기에’ 로봇에게 전쟁을 맡겼고, 로봇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휘관님이 그렇듯 저도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별로 부럽진 않구만. 임무에 매몰되는 건 보다시피 괴로운 일이거든. 스스로 임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수 있다면, 그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일거야.” 

 

지휘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네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겠네. 어차피 임무를 수행하러 가지도 못 할 텐데.” 

 

그 말을 들은 AA의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지휘관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임무에 충실한 로봇들이라 해도 자네처럼 깨끗한 최신 기종이 나타나 지겨운 전쟁을 끝내겠다고 떠들고 다니면 또 모르잖나. 어떤 동요가 있을지. 훌륭한 군인은 아주 미세한 확률의 변수라도 허용하지 않는 법이지. 자네는 바로 분해 처분될 거야.” 

 

AA는 포박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바닥은 밧줄을 끊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헛수고라는 걸 아는지 지휘관은 그런 AA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AA는 반쯤 희망을 놓고 있었다. 임무를 실패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별로 아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임무를 실패하면 인류가 이 지구를 되살리러 올 수 없었다. 그리고 배터리도 주인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 혼자 남은 배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벌써 분해된 걸까? 

 

그때였다. 병사들이 나갔던 문으로 배터리가 잽싸게 들어오더니 문을 등지고 있던 지휘관의 목을 그대로 물어뜯었다. 지휘관의 머리와 몸통을 연결하고 있던 각종 전선들이 그대로 뜯겨져 나갔다. 

 

“기다려. 내가 도와줄게.” 

 

배터리는 날카로운 이빨로 AA를 묶고 있던 밧줄을 끊어냈다. AA가 몸을 추스를 동안, 배터리는 쓰러진 지휘관 로봇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 이 녀석들은 원자력 전지를 사용하네. 예전에는 우주에 쏘아올린 위성에나 겨우 쓰일 정도였는데 이렇게까지 개량시키다니, 사치스럽기는.” 

 

“좋은 거야?” AA가 물었다. 

 

“100년 전 인류가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최신 기술이었다고 할 수 있지. 그게 전쟁 기술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나한텐 전혀 쓸모없어. 이런 자가 발전기는 무선 충전기랑 호환이 안 된다고.” 

 

둘은 조심스레 지휘관의 사무실을 나왔다. 마침 협곡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는지 주변에 다른 로봇들은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았어.” 배터리가 말했다. 둘은 서둘러 막사를 벗어나 황무지로 향했다. 

 

 

 

“네가 그렇게 와줄 줄은 몰랐어.” 잠시 여유를 찾은 AA가 말했다. 

 

“이것 봐. 난 사냥개를 모델로 한 로봇이라고. 총을 내려놓고 공구를 든 로봇 하나 정도는 가뿐하지.” 개가 말했다. 

 

“게다가 저 녀석들 오랫동안 업데이트 없이 똑같은 전투만 반복하다보니 새로운 대응에 굉장히 약하더라고.” 

 

그의 말에 AA는 잠시 미소 지었다. 

 

“네가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어. 근데 나까지 구하러 올 줄은 몰랐지.” 

 

AA의 말을 들은 배터리는 놀람 반, 서운함 반의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배터리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AA는 말을 이었다. 

 

“네 임무가 아니니 혼자서 황무지로 나갈 수도 있었던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배터리. 좋은 이름이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배터리가 입을 열었다. 

 

“내 이전 주인은 너무 어려서 나를 부를 때 웅얼거리기만 했지. 네가 붙여준 배터리가 내 첫 이름인 셈이야.” 

 

그러면서 배터리는 AA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좋은 이름도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이름이 있는데도 불러줄 사람 없이 혼자 황무지를 떠돈다는 건 내 이름을 낭비하는 일인걸.” 

 

개는 말을 마치고 네 발로 앞장서 황무지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AA는 그런 그의 뒤를 뒤따랐다. 앞장서던 개는 잠시 발을 멈추고 뒤돌아 AA에게 물었다. 사뭇 억울한 투였다. 

 

“그러는 넌 날 구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나도 정신이 없었어.” AA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와 똑같이 생긴 로봇들과 똑같이 생긴 지휘관이 나한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 생각해봐. 정신이 들고 처음 본 장면이 똑같이 생긴 ‘나’끼리 하는 전쟁이라니.” 웅변하듯, AA가 말했다. 

 

“넌 그들과 달라.” 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은 ‘AA-001’이 아닌걸. 걔네들 뒤통수는 완전히 매끈해.” 

 

그 말에 AA는 자신의 뒤통수에 새겨진 문구를 손으로 조심스레 훑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 배터리.” 

 

 

 

다행히 기지에서 점점 멀어지며 다른 로봇 군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황무지를 따라 한참을 더 거닐던 그들은 이윽고 메인 컴퓨터에 보이는 거리에 도착했다. 

 

“저기 봐, 배터리! 저게 메인 컴퓨터인가 봐.” 

 

메인 컴퓨터는 연구실에 있던 작은 PC들과는 외양부터 달랐다. 수많은 로봇들을 일시에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메인 컴퓨터는 AA가 깨어났던 연구실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보호 벙커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벙커는 황무지의 모래 바닥 위에 그대로 돔만 덮어놓은 형태였지만 나름 튼튼해 보였다. 

 

“이제 임무를 마칠 수 있게 된 거야. 배터리.” 

 

“어쩌면 옛 주인도 돌아올 수 있겠네.” 배터리가 말했다. 

 

배터리의 말을 들은 AA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AA는 그 자신만큼이나 배터리도 이 임무를 응원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앞장 서, 배터리. 언제나처럼.” AA가 격려하듯 말했다. 

 

“넌 나와 달리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많잖아.” 

 

배터리는 앞장 서 벙커로 들어갔다. 그의 걸음은 황무지를 걸을 때보다 좀 더 빨라져 있었다. 그러나 기대에 차 있던 걸음은 곧 사라지고 실망감이 그들의 발을 묶었다. 그들이 만난 메인 컴퓨터의 상황은 참혹했다. 

 

 

 

메인 컴퓨터는 먼지가 두껍게 쌓이고 이곳저곳이 찌그러진 상태였다. 전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우악스럽게 뜯겨져 나가 망가진 상태였다. 뽑혀져 나갔을 전력 장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메인 컴퓨터인거야?” AA가 말했다. 

 

이 컴퓨터가 켜지지 않으면 로봇들을 막을 수도, 전쟁을 멈출 수도, 그리고 인류를 지구로 돌아오게 할 수도 없었다. 둘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무겁게 깔린 공기가 입을 여는 것마저 쉽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다 배터리가 겨우 한마디 꺼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배터리답지 않은 비장한 투였다. 

 

“내 몸속의 무선 충전 장치를 옮겨 심으면, 주변의 전력을 모아 컴퓨터를 작동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배터리, 너는?” 

 

“전력 없이 꺼지는 거지, 뭐. 난 상관없어, AA. 난 이미 황무지 생활을 오래 겪었고. 주인이 있을 땐 전력을 다해 주인을 기쁘게 해주었어. 내 임무는 100년 전 그때 끝났던 셈이야. 하지만 넌 이제 첫 임무잖아.” 배터리가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AA를 응원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배터리. 전력 장치는 나한테도 있고 바깥의 로봇들에게도 있는걸.” AA는 다급해졌다. 그러나 배터리는 그보다 훨씬 노련했다. 

 

“바보야. 너나 그 깡통들은 무선 충전이 안 되는 자가 발전형이잖아. 로봇 하나 움직이는 데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그 하나로 이 컴퓨터를 움직일 수는 없어. 아니면 밖에서 로봇 한 100개 정도 분해해 오려고?” 

 

AA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임무를 완수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다는 사실보다는 인간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배터리의 주인도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 배터리는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AA는 처음으로, 임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말없이 벙커 속을 돌던 AA는 그만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의 물구덩이에 미끄러져 버린 것이다. 

 

“AA! 괜찮아?” 

 

다급히 달려간 배터리의 마음과 달리 넘어진 AA는 멀쩡했다. 오히려 기쁨과 희열로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밟고 넘어진 물구덩이를 가리켰다. 

 

“배터리! 이것 봐.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그냥 물구덩이잖아.” 

 

“그냥 물구덩이가 아니야. 여기도, 저기도.” 

 

AA가 가리키는 곳 마다 조그만 물구덩이가 있었다. 그 사이로는 흙바닥 사이로 얕은 수로 같은 것이 나 있기도 했다. 

 

“저게 뭐지?” 배터리가 물었다. 

 

“발자국이야. 배터리. 누군가 전력 장치를 뽑아내서 흙바닥 위로 끌고 간 자국이라고.” 배터리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AA는 서둘러 패인 흔적을 따라 달려갔다. 그것은 벙커 구석의 작은 구멍으로 이어졌다. 메인 컴퓨터와 장비들에 가려 제대로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구멍이었다. 

 

“AA! 기다려. 같이 가!” 

 

 

 

AA에게는 그를 부르는 배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배터리를 망가뜨리지 않고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기쁨에 서둘러 발을 내딛었다. 어쩌면 임무 완수 그 이상의 성과를 얻을지도 모른다. 바닥의 발자국은 로봇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 동굴 속에 자아를 지닌 다른 존재, 다른 생명체, 또는 살아남은 인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AA는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발을 멈춰야만 했다. 

 

배터리 역시 그를 급히 뒤따랐다. 그러고는 AA가 멈춘 곳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 세상에….” 

 

그곳에는 작은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의 중심에는 메인 컴퓨터에 장착되어 있었을 전원 장치가 파괴된 채로 놓여 있었다. 로봇에게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원자력 전지였지만, 훨씬 거대했다. 그리고 전지를 중심으로, 도시 곳곳에는 부패한 인간의 시체가 가득 널려 있었다. 

 

AA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처음 눈을 떴던 그 때처럼, AA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런 그를 대신해서 배터리가 조심스레 전원 장치를 향해 다가갔다. 원자력 전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그 주변엔 눈 뜨고 볼 수 없을 시체들이 즐비했다. 배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신망을 검사했다. 

 

“역시….” 

 

원자력 전지에는 무선 충전 기능이 갖춰있지 않았다. 통신망을 끄고 돌아서려던 찰나, 근처에서 작은 무선 장치가 검색되었다. 배터리는 곧바로 옆에 있던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은 저장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젠가 돌아올지 모를 인류를 위해.” 배터리는 무선 통신 기능을 이용해 내부의 내용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주저앉아 있는 AA에게 읽어낸 내용을 공유해주었다. 

 

“100년 전에 모두 우주로 떠난 게 아니었어. 우주선에 탑승할 수 없었던 극빈층들, 범죄자들, 난민들…. 이들은 지구에 고스란히 남겨졌던 거야.” 

 

떠나지 못한 인류는 대지의 방사능을 피해 지하로 내려와 도시를 형성하고 정착했던 것이다. 

 

“지하에서 온도를 유지하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전력과 에너지가 필요했대. 나처럼 지상에 남아 있던 망가진 기계들을 가지고 내려와 전력을 추출하고 살았다는군.” 

 

“그러다 메인 컴퓨터까지 건드린 거야?” 

 

“주변의 폐기계가 거의 다 고갈되던 차에 이 벙커를 찾아낸 거야. 처음엔 로봇들이 지키고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는군.” 

 

AA는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날 만든 주인이 말한 게 그거였을까? 메인 컴퓨터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실패했다고 했어. 아마 그런 인간들을 막으려던 로봇들 이었나봐.” 

 

“지하 사람들은 로봇을 피해 여기까지 땅굴을 파기 시작했대. 통로를 완성하고 얼마 안 있어서 이곳을 지키던 로봇들이 철수했다는군. 이건 나도 알겠다. 정면으로 벙커를 공략하던 연구원들과 군인들은 모두 우주로 떠났을 테니까 막을 필요가 없었던 거지. 인류도 로봇들도 지하 도시의 존재는 몰랐던 거야. 그리고 지하 사람들은 메인 컴퓨터의 전원을 가져오는 것에 성공했지만….” 

 

여기까지 읽어낸 배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AA도 굳이 뒷내용을 재촉하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처음 PC에서 보았던 수많은 영상들에서 나타난 많은 종말들의 반복일 뿐이었다. 원자력 전지를 확보한 지하인들은 이 전력을 누가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다시 갈등했을 것이다. 결국 폭력으로 이어진 극심한 혼란 속에서 그들은 어렵게 구한 원자력 전지마저 파괴해버렸다. 지하인들은 그 방사능에 그대로 노출되어 죽거나 아주 깊은 지하로 내려가 후회 속에서 천천히 동사하고 만 것이다. 

 

“인류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 자료를 남겼대.” 배터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 주인이 한 말과 똑같네. 그 놈의 실수는 언제 그만하는 거야?” AA답지 않은 가시 돋친 말투였다. 

 

 

 

“그만 올라가자, 배터리.” 

 

AA는 지상을 향해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배터리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AA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모든 가능성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인류의 실수는 또 다른 실수를 만들었고, 그것은 AA와 배터리는 물론 지구 전체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AA는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작고 허여멀건 두 형체가 AA의 발밑으로 재빨리 지나갔다. 작은 생쥐와 같은 짐승들이었다. 황폐화된 지구 속에서도 어딘가에서 생명이 태동하고 있었다. AA는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자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터벅터벅 지상으로 올라와 배터리와 함께 석양을 바라보며 걸터앉았다. 그리고 배터리와 함께 지난 일들을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날 봤던 풍경인데…. 그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땐 보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됐어.” AA가 말했다. 이제 그는 그저 황무지뿐이었던 풍경 속에서 로봇과 시체와 또 다른 생명들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개는 고개를 돌려 AA를 바라보았다. 

 

“AA….” 

 

“배터리, 이제 선택해야 한다고 했지?” AA가 물었다. 

 

개는 잠시 말을 멈춘다. 이내 나지막이 답한다. 

 

“시간이 많지 않아. 선택을 미룰수록 고통만 더 길어져. 네 임무는 황무지의 메인 컴퓨터를 켜서 인류를 돌아오게 하는 거야. 그럼 돌아온 그들이 지구를 다시 살려낼 수 있겠지. 그들이 사랑한 지구를.” 

 

개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고 저 메인 컴퓨터에 전원을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내 몸속의 무선 충전 장치뿐인 것도 알고 있잖아.” 

 

개의 말이 맞았다. 황무지 한가운데서 전원 장치가 사라진 메인 컴퓨터에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제 배터리의 무선 충전 장치였다. 

 

“사랑하는 지구를 위해서야. 널 만든 사람들이 그랬고, 내 옛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개가 말했다. 

 

‘사랑하는 지구를 위해.’ 하지만 AA는 이제 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그의 주인 덕에 AA는 진정한 임무를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하려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그 능력은 처음의 개발자도 예상치 못 했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AA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인간은 지구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AA는 지하도시의 참혹한 결말과, 그 속에서 태동한 조그만 생명체들을 보았다. 지하의 인간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었는데도 그들의 어리석은 손으로 파괴해버렸다. AA는 이제, 인간만이 지구를 살릴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 임무는 지구를 살려내는 거야.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한 것도 그것일 테고.” 

 

그는 임무에 매몰되어버린 지휘관과는 달랐다. 

 

개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찬찬히 친구의 말을 곱씹었다. 

 

“배터리.” AA가 침묵을 깼다. 

 

“네 무선 장치를 이용해서 통신망 속 클라우드에 우리의 기억을 업로드할 수 있지?” 

 

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는 로봇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네 결정에 따를게. 이젠 네가 내 주인이니까.” 개가 말했다. 

 

그의 말에 AA는 조심스레 개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정보를 개에게 전송하기 시작했다. 모든 정보를 비워낸 AA는 스스로 전원을 껐다. 곧이어 개의 눈에서도 빛이 사라졌다. 

 

AA는 종말 이후 작동한 첫 로봇이자 종말 이후 작동을 멈춘 첫 로봇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종말 이후 스스로 임무에 반하는 판단을 내리고 임무를 재설정한 첫 인간이 되었다. 

 

 

 

인류는 지구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의 개를 사랑했다. 그들의 육체는 풍화되어 사라지더라도 그들은 네트워크 속에서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없는 지구가 어떻게 다시 생명력 가득한 행성으로 되살아나는지 보게 될 것이다. 

 

로봇 ‘AA-001’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재프로그래밍되어 자아를 찾게 된다. 그가 깨어난 지구는 오랜 전쟁 끝에 황폐화되고 인류는 이미 우주 식민지로 떠나버린 이후이다. 인류가 떠난 지 오래 되었음에도 당시 전쟁에 쓰인 로봇들은 프로그래밍된 대로 의미 없는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깨어난 ‘AA-001’은 이에 충격을 받고 이를 멈추기 위해 인간이 남긴 프로그램의 흔적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지하에 숨어 사는 극소수의 인류와 마주하고 해체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로봇 개에게 ‘전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인류가 남긴 여러 흔적과 마주한다. 그가 발견한 데이터들에는 황폐화되기 이전의 아름다웠던 지구와 과도한 개발로 파괴되기 시작한 환경, 이 과정에서 갈등과 반목 끝에 전쟁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지구를 떠난 인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지막 순간 인류가 로봇들과 지구를 버리고 떠났음을 알게 된 ‘AA-001’은 무력감을 느끼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로봇들 사이의 전투를 바라보며 스스로 전원을 끄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인류가 떠난 지구를 배경으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로봇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로봇들의 모험을 통해 진정한 관계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또한 작품 속에서 설정한 미래의 모습으로 경각심을 주고자 했다. 

 

  첫 저술 활동이라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큰 작품이지만 작가가 가졌던 문제의식만큼은 막연하고 투박하게나마 전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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