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라인 : 외동아들을 잃은 중년의 부부가 슬픔과 아픔을 함께 극복해 가는 이야기.
작의 : 나의 정체성에 대해, 뇌과학자들은 기억의 일관성과 동일성이 나의 정체성을 만든다고 합니다. 한데 기억은 입력 단계부터 뇌에 의해 필터링되어 뇌의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저장되고, 출력될 때는 뇌에 의해 재편집 혹은 재각색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죄 피해자가 그린 범인 몽타주의 신뢰도 또한 실제로는 매우 낮다고 합니다.
이는 두개골 속에 갇힌 1.5kg짜리 고깃덩어리인 뇌가 눈, 코, 귀, 입, 피부를 통해 전달받은 감각을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을 통해 인식하고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이처럼 지극히 주관적이고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특정 기억과 관련된 다른 정서의 기억을 삽입해, 뇌가 특정 기억을 출력할 때 원래와는 다른 정서를 가진 기억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여기서 저의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 등장인물 :
- 영호 (남, 55세) 뇌과학자
- 순조 (여, 53세) 재일의 부인 / 아들의 죽음 후 PTSD 시달리고 있으며, 현재는 심각한 몽유병 증세까지 보이고 있음
- 지욱 (남, 30세) 기억 성형술사 / 전직 뇌과학자, 영호의 제자였음
- 지율 (여, 21세) 지욱의 여동생 / 지체장애가 있는 고도비만
※ 줄거리
늘 밤에도 순조는 커터칼을 들고 남편의 서재 문을 난도질하고 있다. 반년 전부터 시작된 몽유병이다. 2년 전 막 대학에 입학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이후 아내는 심각한 자동차 PTSD에 시달렸다. 꾸준한 심리치료로 나아지는 것 같더니 일 년 전부턴 몽유병 증세까지 나타났다. 처음엔 한밤중에 집안을 서성이는 정도였으나, 갈수록 심해져 최근엔 칼까지 들었다.
오랜 상담치료로도 심각해지는 아내의 증상에 영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욱의 상담소를 찾는다. 지욱은 3년 전 불법으로 기억성형술을 시도했다 큰 사고를 치고 영호의 연구소에서 퇴출되다시피 쫓겨난 제자다. 뇌과학자인 영호의 연구 분야는 뇌파 자극으로 뇌에 원하는 지도를 그리는 뇌지도 드로잉(drawing) 기술이다. 그의 연구는 다양한 중독자들을 구제하는 것에서 효과를 보았다. 상업회사들은 이 의료용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접촉했지만, 그는 완벽하지 않은 기술의 위험성 때문에 반대했다. 그런데 그걸 지욱이 몰래 시도하다 걸린 거였다. 현재 지욱은 뇌파를 이용한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뒤로는 기억성형술을 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었다.
영호는 순조에겐 몽유병 치료때문이라고 둘러대고 기억성형술은 비밀로 한다. 아들이 죽는 순간을 다른 기억으로 바꾸는 걸 그녀는 당연히 승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성형술은 크게 3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바꾸고 싶은 기억과 연관이 있는 영화로 뇌지도의 기본값을 측정하고, 그걸 기반으로 악몽의 순간을 그린다. 그리고 나서 특정 기억에 정서적 영향을 줄 10초 안팎의 짧은 영상 기억을 만든다. 만들어진 기억은 VR기기처럼 생긴 뇌파 드로잉 기계를 통해 내담자의 머리에 직접 삽입한다. 그러면 뇌가 알아서 삽입된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으로 재편집한다. 특정 기억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편집될 수 있게 특정 기억의 정확한 저장 위치를 자극하며 만든 기억을 삽입하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다. 영호는 단골이 여럿이라며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는 지금의 지욱이 못 미더웠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지욱은 나름 영특한 제자였다.
첫 번째 뇌파의 기본값을 그리는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순조가 교통사고 장면이 많은 영화를 보던 중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데 사무실 안쪽 집에서 바깥을 지켜보던 지율이 나와 괴로워하는 순조의 손을 잡아주었다. 지욱은 당황했지만, 영호는 오래전 지욱이 무리하게 실험을 강행했던 이유가 동생 지율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내버려 두었다. 지율은 순조의 검사 시간 내내 순조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녀 덕분에 순조의 뇌지도의 기본값이 완성되었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순조에게 지율은 음식을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오빠가 해주지 않는다면서. 순조는 난감했다. 아들이 죽고 나서 그녀는 음식을 한 적이 없다. 난감한 채로 첫 번째 시술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인 기본값을 토대로 악몽의 순간을 그려야 하는 날 문제가 생긴다. PTSD의 경우, 삽입할 기억을 그리는 거만큼이나 어려운 게 그날의 기억을 그리는 거다. PTSD를 일으킨 기억은 유난히 잘 숨는다.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 때문이다. 그래서 최면을 이용하는데, 몽유병이 있는 순조에게 무리일 수 있다. 역시나 순조는 최면 도중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한다. 영호는 자신의 무모한 결정을 후회하며 시술을 멈추려 하지만, 지욱은 각오하시고 오신 거 아니냐며 끝까지 진행한다.
그런 지욱에게 영호는 지욱의 과거를 들먹이며 격하게 몰아붙인다. 지욱은 3년 전에도 심각한 우울증으로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던 동생 지율에게 기억성형술을 무리하게 시도했고 그 결과 그녀의 뇌 일부를 파괴됐다. 그는 연구소에서 퇴출되고서 생계를 위해 기억성형술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지율을 위한 데이터를 쌓는 것이다. 하지만 지율의 이미 망가진 뇌에는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지금 영호의 실험에서 보였다. 이번 순조의 기억성형술을 비밀로 해주기로 한 것도 그래서이다. 영호는 그의 기억성형술이 효과가 있으면, 연구의 첫 번째 임상 실험자로 지율을 치료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순조는 호흡곤란까지 겪었지만, 지욱은 끝까지 몰아붙였고 덕분에 무의식에 숨어있던 기억을 끄집어내 완벽한 좌표를 찍었다. 영호는 그런 지욱을 불안해했지만, 끝까지 제대로 말리진 않았다.
지욱은 그런 영호가 이상하다. 한데 영호의 태도만큼 순조의 기억이 더 이상하다. 겪은 것이 아니라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 심각한 해리 증상이라면 납득이 되지만, 순조의 증상은 과다각성 상태에 더 가깝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간, 사무실 안쪽에서 탄내와 연기가 새어 나온다. 놀란 지욱이 문을 열어젖히자, 자욱한 연기 속에서 지율이 울며 서 있다. 지욱이 시술을 하는 틈에 혼자 카레를 끓이다 냄비를 제대로 태운 거다. 두 번째 시술도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런데 탄내와 연기 속에서, 순조는 최면 속에서도 보지 못한 죽은 아들 우주를 본다. 우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돌아보는 건 남편 영호다. 순조는 서럽게 운다. 영호는 우는 아내를 위로조차 하지 못 한다. 오히려 울던 지율이 그녀와 함께 울며 위로해준다.
그날 밤 순조가 사라졌다. 아니 몽유 상태로 차를 몰고 나갔다. 영호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마냥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불안해 미칠 거 같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기억성형술을 시도한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무책임하고 무모했던 지욱에게로 향했다. 그는 한달음에 지욱에게로 달려갔다. 지욱은 영호의 불안을 이해하기에 화를 받아주었지만, 동생을 위해 한 그의 모든 실험을 실패작이라고 공격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반격한다. 잘나신 교수님 바로 당신이 애초에 사랑하는 사모님 머리에 잘 못 된 그림을 그린 당사자아니냐며. 최면을 했던 그날 순조의 기억은 이상했었다. 분명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의 큰 사고였는데, 턱을 넘는 순간 모든 게 이상하리만큼 수월했다. 더군다나 최면상태에서 순조는 그 날을 겪었다기보단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랬다. 순조 PTSD의 원인인 교통사고는 인위적으로 삽입된 기억이었다. 기억성형술에서 절대 해선 안 되는 게 있다면 나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기억의 일관성과 동일성에 어긋나는 기억을 삽입하는 거다. 그런데 영호는 거의 운전을 하지 않는 순조가 일으킨 교통사고에서 아들이 죽은 걸로 기억을 삽입했고 그러니 당연히 부작용이 생긴 거다. 그래서 영호가 순조를 입원시키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거고, 불법인 줄 알면서도 지욱을 찾아온 거였다.
지욱의 지적이 맞지만, 영호는 인정할 수 없다. 애초에 이 기술의 바탕을 만든 게 나였다. 그런데 너 따위가 나를 비난한단 말인가. 영호의 분노에 살기가 띄자, 숨 죽인 채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지율이 비명을 지르며 극도의 두려움을 표현한다. 지율의 비명에 두 사람의 싸움이 일순 멈춘다. 그 정적을 뚫으며 영호의 전화기가 울린다. 경찰서다. 순조는 아들이 다녔던 대학 정문에서 발견되었다. 몽유 상태로 무려 20여 km를 운전한 거다. 사고가 안 난 건 천운이었다. 순조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다음 날 영호는 다시 지욱을 찾는다. 그리고는 힘겹게 그 날의 진실을 말한다. 아들 우주는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대학 기숙사에서 자살을 했다고 한다. 20살의 창창한 미래를 앞둔 아이가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아무도 모른다고. 많이 힘들어 했던 아내는 스스로를 탓하며 일 년 전부터는 자살 시도를 숱하게 저질렀고 마지막엔 정말 죽을 뻔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호는 기억성형술을 이용해 아내의 기억을 조작했다. 피해자인 가족이 스스로를 가해자로 몰아가며 괴롭히는 자살보단 사고로 죽는 게, 아내의 고통을 조금은 덜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러 가던 고속도로에서 목격한 대형 교통사고로 아들이 죽은 거처럼 기억을 조작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때부터 아내는 자살 시도를 하지 않았다. 대신 교통사고에 대한 PTSD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러다 몽유병까지 생긴 거라고 한다. 그러니 제발 아들처럼 아내도 잃을 수 없다며, 뭐든 상관없으니 다른 나은 죽음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협박한다. 지율을 평생 저렇게 살게 할거냐며.
결국 지욱은 삽입할 기억을 만들었다. 하지만 뇌의 착각을 유도하는 건 카지나의 삼각형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러야 한다. 또 다른 새로운 죽음으로 덧씌우는 건 위험하다. 더군다나 이미 순조의 뇌는 ptsd에 몽유병까지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운전자를 순조에서 우주로 바꾸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적어도 자신의 운전미숙으로 아들을 잃는 것 보다 나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기억을 삽입하러 와서 순조는 갖은 핑계로 시술을 머뭇거린다. 하다못해 배가 고프다며 지율과 카레를 끓이기까지 한다. 뇌에 무리가 가는 작업이라 순조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했기에 순조의 말에 따르지만 실은 영호는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교통사고 ptsd가 몽유상태에서 운전을 했다는 건 뇌에 심각한 인지충돌이 있었다는 건데, 지금 저 상태는 너무 편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뇌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다 기억해냈다는 거다. 하지만 영호는 인정할 수 없다. 절대 그럴 순 없다. 어떻게 견딘 2년인데. 영호는 시술을 강행한다.
그런데 순조가 갑자기 강하게 거부한다. 본적 없는 순조의 반응에 당황한 영호는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지욱은 처음엔 영호에게 동의했지만, 두 사람의 싸움에 철없는 지율의 울음이 터지고 그런 지율을 순조가 엄마처럼 달래는 모습을 보며 순조의 편에 선다. 영호는 그런 지욱이 괘씸해 지욱에게 독설을 내뱉는다. 대학 연구소에 있을 때도 건방을 떨다 사고를 치더니 여즉 그 버릇을 못 고쳤다고. 그렇게 싸움은 지욱과 영호의 육탄전으로 번지고 놀란 지율이 경기를 하며 일순 난장판이 된다.
그렇게 영호의 손에 끌려 나가던 순조가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듯 말한다. 나에게서 우주를 다시 빼앗아가지 말라고. 우주의 마지막도 나는 죽는 날까지 기억할거라고. 폭포처럼 쏟아내던 순조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떨린다. 그리고 나 안 죽는다고. 절대 당신 죽기 전엔 안 죽을 거니깐. 당신도 죽지 말라고. 우주처럼 당신이나 죽지말라며 오열한다.
사실 아들의 죽음 이후 먼저 자살을 시도한 건 영호였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였기에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든 게 자신의 책임같았다. 그렇지만 목을 맨 전등이 부서지면서 그의 자살 시도는 불발되었다. 이건 그만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순조는 알고 있었다. 그날부터였다. 순조가 손목을 긋기 시작한 건. 처음엔 남편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거였지만, 남편마저 떠나는 걸 보느니 자신이 먼저 떠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진심으로 시도했던 마지막 자살 시도에선 성공할 뻔했었다. 이 날 이후 영호는 순조의 기억을 조작했고, 순조는 더 이상 자살시도를 하지 않았다. 허나 그녀 안에 내재된 남편의 자살시도를 막지 못했던 공포는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것이 몽유 상태로 표출되었다. 그녀가 칼을 들고 남편의 서재 앞에 서 있었던 건, 꿈 속에서라도 남편의 목에 메인 줄을 끊으려던 거였다. 영호가 순조의 기억에 다른 기억을 삽입해 아들의 자살은 숨겼지만, 그에 의해 파생된 또 다른 아픔과 두려움까진 막을 순 없었다.
기억을 깨운 강력한 트리거는 순조가 최면 상태 즉 무의식중에 맡은 탄내였다. 우주의 자살 소식을 들었던 날 온 집안을 가득 채웠던 음식 탄내. 그 탄내와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녀가 본건 우주뿐 만이 아니었다. 거기엔 남편도 있었다. 우주처럼 자신을 떠나려 했던. 그리고 몽유 상태로 운전을 하고 돌아와 잠결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살려고 애쓰는 자신을 만났다. 우주는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결국 만날 거니깐. 사랑하는 남편의 눈에서 피눈물을 내면서까지 서두를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나를 살리려는 노력 반만이라도 이젠 당신 스스로를 살리라고 울부짖는다. 그제야 영호의 마른 얼굴에서도 눈물이 터진다. 영호가 순조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에 집착했던 건, 아내만이 아들의 죽음이 가져온 절망과 슬픔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자신의 소임은 아내를 치료하는 것이라는 현실 회피였다. 삼자처럼 구는 것. 그의 뇌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서 택한 최선의 자기방어였다.
두 사람은 어린애처럼 서로를 부등켜 안고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아들의 죽음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은 같은 아픔을 함께 마주하고, 사랑과 연민으로 서로를 보듬었다. 시커멓게 죽은 반쪽을 무겁게 짊어지고도 살아있는 반쪽의 가지로 푸른 잎을 피우던 벼락맞은 고목처럼. end.
※ 등장인물 :
- 영호 (남, 55세) 뇌과학자
- 순조 (여, 53세) 재일의 부인 / 아들의 죽음 후 PTSD 시달리고 있으며, 현재는 심각한 몽유병 증세까지 보이고 있음
- 지욱 (남, 30세) 기억 성형술사 / 전직 뇌과학자, 영호의 제자였음
- 지율 (여, 21세) 지욱의 여동생 / 지체장애가 있는 고도비만
※ 줄거리
늘 밤에도 순조는 커터칼을 들고 남편의 서재 문을 난도질하고 있다. 반년 전부터 시작된 몽유병이다. 2년 전 막 대학에 입학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이후 아내는 심각한 자동차 PTSD에 시달렸다. 꾸준한 심리치료로 나아지는 것 같더니 일 년 전부턴 몽유병 증세까지 나타났다. 처음엔 한밤중에 집안을 서성이는 정도였으나, 갈수록 심해져 최근엔 칼까지 들었다.
오랜 상담치료로도 심각해지는 아내의 증상에 영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욱의 상담소를 찾는다. 지욱은 3년 전 불법으로 기억성형술을 시도했다 큰 사고를 치고 영호의 연구소에서 퇴출되다시피 쫓겨난 제자다. 뇌과학자인 영호의 연구 분야는 뇌파 자극으로 뇌에 원하는 지도를 그리는 뇌지도 드로잉(drawing) 기술이다. 그의 연구는 다양한 중독자들을 구제하는 것에서 효과를 보았다. 상업회사들은 이 의료용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접촉했지만, 그는 완벽하지 않은 기술의 위험성 때문에 반대했다. 그런데 그걸 지욱이 몰래 시도하다 걸린 거였다. 현재 지욱은 뇌파를 이용한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뒤로는 기억성형술을 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었다.
영호는 순조에겐 몽유병 치료때문이라고 둘러대고 기억성형술은 비밀로 한다. 아들이 죽는 순간을 다른 기억으로 바꾸는 걸 그녀는 당연히 승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성형술은 크게 3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바꾸고 싶은 기억과 연관이 있는 영화로 뇌지도의 기본값을 측정하고, 그걸 기반으로 악몽의 순간을 그린다. 그리고 나서 특정 기억에 정서적 영향을 줄 10초 안팎의 짧은 영상 기억을 만든다. 만들어진 기억은 VR기기처럼 생긴 뇌파 드로잉 기계를 통해 내담자의 머리에 직접 삽입한다. 그러면 뇌가 알아서 삽입된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으로 재편집한다. 특정 기억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편집될 수 있게 특정 기억의 정확한 저장 위치를 자극하며 만든 기억을 삽입하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다. 영호는 단골이 여럿이라며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는 지금의 지욱이 못 미더웠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지욱은 나름 영특한 제자였다.
첫 번째 뇌파의 기본값을 그리는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순조가 교통사고 장면이 많은 영화를 보던 중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데 사무실 안쪽 집에서 바깥을 지켜보던 지율이 나와 괴로워하는 순조의 손을 잡아주었다. 지욱은 당황했지만, 영호는 오래전 지욱이 무리하게 실험을 강행했던 이유가 동생 지율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내버려 두었다. 지율은 순조의 검사 시간 내내 순조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녀 덕분에 순조의 뇌지도의 기본값이 완성되었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순조에게 지율은 음식을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오빠가 해주지 않는다면서. 순조는 난감했다. 아들이 죽고 나서 그녀는 음식을 한 적이 없다. 난감한 채로 첫 번째 시술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인 기본값을 토대로 악몽의 순간을 그려야 하는 날 문제가 생긴다. PTSD의 경우, 삽입할 기억을 그리는 거만큼이나 어려운 게 그날의 기억을 그리는 거다. PTSD를 일으킨 기억은 유난히 잘 숨는다.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 때문이다. 그래서 최면을 이용하는데, 몽유병이 있는 순조에게 무리일 수 있다. 역시나 순조는 최면 도중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한다. 영호는 자신의 무모한 결정을 후회하며 시술을 멈추려 하지만, 지욱은 각오하시고 오신 거 아니냐며 끝까지 진행한다.
그런 지욱에게 영호는 지욱의 과거를 들먹이며 격하게 몰아붙인다. 지욱은 3년 전에도 심각한 우울증으로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던 동생 지율에게 기억성형술을 무리하게 시도했고 그 결과 그녀의 뇌 일부를 파괴됐다. 그는 연구소에서 퇴출되고서 생계를 위해 기억성형술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지율을 위한 데이터를 쌓는 것이다. 하지만 지율의 이미 망가진 뇌에는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지금 영호의 실험에서 보였다. 이번 순조의 기억성형술을 비밀로 해주기로 한 것도 그래서이다. 영호는 그의 기억성형술이 효과가 있으면, 연구의 첫 번째 임상 실험자로 지율을 치료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순조는 호흡곤란까지 겪었지만, 지욱은 끝까지 몰아붙였고 덕분에 무의식에 숨어있던 기억을 끄집어내 완벽한 좌표를 찍었다. 영호는 그런 지욱을 불안해했지만, 끝까지 제대로 말리진 않았다.
지욱은 그런 영호가 이상하다. 한데 영호의 태도만큼 순조의 기억이 더 이상하다. 겪은 것이 아니라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 심각한 해리 증상이라면 납득이 되지만, 순조의 증상은 과다각성 상태에 더 가깝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간, 사무실 안쪽에서 탄내와 연기가 새어 나온다. 놀란 지욱이 문을 열어젖히자, 자욱한 연기 속에서 지율이 울며 서 있다. 지욱이 시술을 하는 틈에 혼자 카레를 끓이다 냄비를 제대로 태운 거다. 두 번째 시술도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런데 탄내와 연기 속에서, 순조는 최면 속에서도 보지 못한 죽은 아들 우주를 본다. 우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돌아보는 건 남편 영호다. 순조는 서럽게 운다. 영호는 우는 아내를 위로조차 하지 못 한다. 오히려 울던 지율이 그녀와 함께 울며 위로해준다.
그날 밤 순조가 사라졌다. 아니 몽유 상태로 차를 몰고 나갔다. 영호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마냥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불안해 미칠 거 같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기억성형술을 시도한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무책임하고 무모했던 지욱에게로 향했다. 그는 한달음에 지욱에게로 달려갔다. 지욱은 영호의 불안을 이해하기에 화를 받아주었지만, 동생을 위해 한 그의 모든 실험을 실패작이라고 공격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반격한다. 잘나신 교수님 바로 당신이 애초에 사랑하는 사모님 머리에 잘 못 된 그림을 그린 당사자아니냐며. 최면을 했던 그날 순조의 기억은 이상했었다. 분명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의 큰 사고였는데, 턱을 넘는 순간 모든 게 이상하리만큼 수월했다. 더군다나 최면상태에서 순조는 그 날을 겪었다기보단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랬다. 순조 PTSD의 원인인 교통사고는 인위적으로 삽입된 기억이었다. 기억성형술에서 절대 해선 안 되는 게 있다면 나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기억의 일관성과 동일성에 어긋나는 기억을 삽입하는 거다. 그런데 영호는 거의 운전을 하지 않는 순조가 일으킨 교통사고에서 아들이 죽은 걸로 기억을 삽입했고 그러니 당연히 부작용이 생긴 거다. 그래서 영호가 순조를 입원시키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거고, 불법인 줄 알면서도 지욱을 찾아온 거였다.
지욱의 지적이 맞지만, 영호는 인정할 수 없다. 애초에 이 기술의 바탕을 만든 게 나였다. 그런데 너 따위가 나를 비난한단 말인가. 영호의 분노에 살기가 띄자, 숨 죽인 채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지율이 비명을 지르며 극도의 두려움을 표현한다. 지율의 비명에 두 사람의 싸움이 일순 멈춘다. 그 정적을 뚫으며 영호의 전화기가 울린다. 경찰서다. 순조는 아들이 다녔던 대학 정문에서 발견되었다. 몽유 상태로 무려 20여 km를 운전한 거다. 사고가 안 난 건 천운이었다. 순조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다음 날 영호는 다시 지욱을 찾는다. 그리고는 힘겹게 그 날의 진실을 말한다. 아들 우주는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대학 기숙사에서 자살을 했다고 한다. 20살의 창창한 미래를 앞둔 아이가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아무도 모른다고. 많이 힘들어 했던 아내는 스스로를 탓하며 일 년 전부터는 자살 시도를 숱하게 저질렀고 마지막엔 정말 죽을 뻔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호는 기억성형술을 이용해 아내의 기억을 조작했다. 피해자인 가족이 스스로를 가해자로 몰아가며 괴롭히는 자살보단 사고로 죽는 게, 아내의 고통을 조금은 덜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러 가던 고속도로에서 목격한 대형 교통사고로 아들이 죽은 거처럼 기억을 조작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때부터 아내는 자살 시도를 하지 않았다. 대신 교통사고에 대한 PTSD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러다 몽유병까지 생긴 거라고 한다. 그러니 제발 아들처럼 아내도 잃을 수 없다며, 뭐든 상관없으니 다른 나은 죽음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협박한다. 지율을 평생 저렇게 살게 할거냐며.
결국 지욱은 삽입할 기억을 만들었다. 하지만 뇌의 착각을 유도하는 건 카지나의 삼각형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러야 한다. 또 다른 새로운 죽음으로 덧씌우는 건 위험하다. 더군다나 이미 순조의 뇌는 ptsd에 몽유병까지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운전자를 순조에서 우주로 바꾸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적어도 자신의 운전미숙으로 아들을 잃는 것 보다 나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기억을 삽입하러 와서 순조는 갖은 핑계로 시술을 머뭇거린다. 하다못해 배가 고프다며 지율과 카레를 끓이기까지 한다. 뇌에 무리가 가는 작업이라 순조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했기에 순조의 말에 따르지만 실은 영호는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교통사고 ptsd가 몽유상태에서 운전을 했다는 건 뇌에 심각한 인지충돌이 있었다는 건데, 지금 저 상태는 너무 편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뇌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다 기억해냈다는 거다. 하지만 영호는 인정할 수 없다. 절대 그럴 순 없다. 어떻게 견딘 2년인데. 영호는 시술을 강행한다.
그런데 순조가 갑자기 강하게 거부한다. 본적 없는 순조의 반응에 당황한 영호는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지욱은 처음엔 영호에게 동의했지만, 두 사람의 싸움에 철없는 지율의 울음이 터지고 그런 지율을 순조가 엄마처럼 달래는 모습을 보며 순조의 편에 선다. 영호는 그런 지욱이 괘씸해 지욱에게 독설을 내뱉는다. 대학 연구소에 있을 때도 건방을 떨다 사고를 치더니 여즉 그 버릇을 못 고쳤다고. 그렇게 싸움은 지욱과 영호의 육탄전으로 번지고 놀란 지율이 경기를 하며 일순 난장판이 된다.
그렇게 영호의 손에 끌려 나가던 순조가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듯 말한다. 나에게서 우주를 다시 빼앗아가지 말라고. 우주의 마지막도 나는 죽는 날까지 기억할거라고. 폭포처럼 쏟아내던 순조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떨린다. 그리고 나 안 죽는다고. 절대 당신 죽기 전엔 안 죽을 거니깐. 당신도 죽지 말라고. 우주처럼 당신이나 죽지말라며 오열한다.
사실 아들의 죽음 이후 먼저 자살을 시도한 건 영호였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였기에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든 게 자신의 책임같았다. 그렇지만 목을 맨 전등이 부서지면서 그의 자살 시도는 불발되었다. 이건 그만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순조는 알고 있었다. 그날부터였다. 순조가 손목을 긋기 시작한 건. 처음엔 남편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거였지만, 남편마저 떠나는 걸 보느니 자신이 먼저 떠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진심으로 시도했던 마지막 자살 시도에선 성공할 뻔했었다. 이 날 이후 영호는 순조의 기억을 조작했고, 순조는 더 이상 자살시도를 하지 않았다. 허나 그녀 안에 내재된 남편의 자살시도를 막지 못했던 공포는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것이 몽유 상태로 표출되었다. 그녀가 칼을 들고 남편의 서재 앞에 서 있었던 건, 꿈 속에서라도 남편의 목에 메인 줄을 끊으려던 거였다. 영호가 순조의 기억에 다른 기억을 삽입해 아들의 자살은 숨겼지만, 그에 의해 파생된 또 다른 아픔과 두려움까진 막을 순 없었다.
기억을 깨운 강력한 트리거는 순조가 최면 상태 즉 무의식중에 맡은 탄내였다. 우주의 자살 소식을 들었던 날 온 집안을 가득 채웠던 음식 탄내. 그 탄내와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녀가 본건 우주뿐 만이 아니었다. 거기엔 남편도 있었다. 우주처럼 자신을 떠나려 했던. 그리고 몽유 상태로 운전을 하고 돌아와 잠결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살려고 애쓰는 자신을 만났다. 우주는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결국 만날 거니깐. 사랑하는 남편의 눈에서 피눈물을 내면서까지 서두를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나를 살리려는 노력 반만이라도 이젠 당신 스스로를 살리라고 울부짖는다. 그제야 영호의 마른 얼굴에서도 눈물이 터진다. 영호가 순조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에 집착했던 건, 아내만이 아들의 죽음이 가져온 절망과 슬픔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자신의 소임은 아내를 치료하는 것이라는 현실 회피였다. 삼자처럼 구는 것. 그의 뇌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서 택한 최선의 자기방어였다.
두 사람은 어린애처럼 서로를 부등켜 안고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아들의 죽음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은 같은 아픔을 함께 마주하고, 사랑과 연민으로 서로를 보듬었다. 시커멓게 죽은 반쪽을 무겁게 짊어지고도 살아있는 반쪽의 가지로 푸른 잎을 피우던 벼락맞은 고목처럼. end.